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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회 프락치 사건의 재발견>> 반공독재. 빨갱이의 시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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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년의시간
댓글 0건 조회 32회 작성일 22-01-26 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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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기 한국외대 명예교수가 2008년 9월 <<국회 프락치 사건의 재발견>>, <<국회 프락치 사건 재판 기록 : 미국무부 외교문서>>(한울) 모두 3권, 1000쪽이 넘는 방대한 연구서를 발간했다. 김교수는 역사학자도 법학자도 아니다. 정치커뮤니케이션 전공의 원로 학자다.  그런 그가 이 책을 집필하게된 것은 한국 민주주의를 진정으로 염원했던 한 미국 외교관과의 인연 때문이다. 


외국인이 쓴 최초의 본격적인 한국 정치 연구서인 << 소용돌이의 한국정치>>(한울. 1966)의 저자 그레고리 헨더슨(1922~1988)이 그 사람이다. 1948년 주한 미 대사관 3등 서기관으로 외교관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사건 당시 일찍이 국회 프락치 사건 재판의 중요성에 주목해 전 공판(15회)과정 전체를 기록했고, 이 사건의 정치적, 법적 정당성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덧붙여 미 국무부에 보고했다.


1963년 외교관을 갑작스럽게 퇴임했다. 1972년 7월 한달 간 한국을 방문해 오제도 검사, 사광욱 판사 등 당시 재판을 진행했던 검사와 판사 등 관련자들을 인터뷰했다. 그러나 1988년 10월 16일 불의의 사고로 별세했다. 핸더슨의 별세 이후 김정기 교수가 그의 연구자료를 모두 물려받아 국회 프락치 사건의 전모를 파헤친 것이다. 국회 프락치 사건이란 무엇인가?


1949년 6월 6일 일단의 친일 경찰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 활동을 무력화시켰다. 이후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 10월 친일 매국노 처단을 위한 특별검찰과 특별재판부가 해산되면서  반민특위는 종말을 맞았다.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려던 국민들의 염원은 친일 매국노집단 의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두고두고 가슴 아픈 일이다. 현재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으니 하늘에 있는 독립운동을 했던 선조들이 보면 뭔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후 이승만 장기 집권을 위한 정치 테러가 자행된다. 바로 국회 프락치 사건김구 암살이다. 1949년 5월 이문원, 이구수, 최태규 등 이른바 소장파 국회의원 3명이 체포된 후 6월 21일 소장파 의원의 리더격인 노일환과 김옥주 의원 등 6명의 국회의원이, 25일에는 소장파의 정신적 지주였던 국회부의장 김약수가 검거됐다. 다음날 26일에는 김구 선생이 안두희의 총탄에 희생됐다. 이어 8월에는 신성균 등 소장파 의원 6명이 체포됐다. 3차례 소장파 의원 15명 중 13명은 '남로당 프락치'라는 혐으로 기소됐다. 그리고 2심 재판을 기다리던 이들은 6.25전쟁이 발발하여 서울에 들어왔던 북한군에 석방됐다.


이들 중 서용길을 제외한 12명은 9.28 서울 수복 직전 북한군과 함께 북한으로 넘어갔다. 이들의 북한행이 납북인지 월북인지를 확인할 방법은 없다. 그러나 북한으로 넘어갔다는 사실 자체로 공산당 프락치라는 대중의 인식이 굳어졌고, 이후 국회 프락치 사건의 진실은 묻히고 말았다. 그러나 국회 프락치 사건은 헌법기관에 대한 최초의 조직적 정치 테러라는 점에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퇴행시킨 결정적 한 방이었고, 이후 40년간 빨갱이를 내세운 반공독재의 시초가 되었다.


2008년도에 출간된 << 국회 프락치 사건의 재발견>>은 유족들에게는 용기가 되기도 했고, 특히 김진원씨는 노일환의 조카 노시선씨가 남긴 장문의 유고(2019년 별세)를 전하면서 다음과 같은 노씨의 말을 전했다. "내가 <<국회 프락치 사건의 재발견>>이라는 책을 우연히 발견했네, 그때 나의 마음은 깊이 숨은 용광로가 폭발하는 기분이었네. 내가 반드시 백부님의 진실을 밝히겠네."  그러면 왜 이문원, 노일환 등 소장파 의원들은 이승만 정권의 정치 테러 대상이 되었을까?


그것은 그들이 진정으로 민의를 대변했기 때문이다. 반민특위 설치, 외국군 철수 결의안, 평화통일 촉구 등이 그것이다. 1948년 5월 10일 치러진 총선에 김구, 김규식 등 남한 단독정부 반대세력은 참여하지 않았다. 총선결과 이승만 계열의 대한독립촉성회 55명, 한민당 29명이 당선된 반면 이들 젊은 정치 지망생들은 무려 85명이 당선됐다. 이 숫자를 보면 이 당시에 이승만은 국민들의 지지를 못받았다. 항상 나는 김구 선생이 총선에 불참하지 말고 참여해서 많은 당선자를 내서 국회로 들어가 소장파 의원들과 세勢를 규합해서 이승만이 악법을 만들지 못하게 저지해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정치기반을 마련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물론 역사에는 만약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해방 후 3년의 기간동안 김구 선생의 행적은 실망 그 자체다. 외교도, 국제정세도, 한반도의 역학관계에 대해서도..오직 통일이라! 미.소가 점령하고 그들만의 정치적 계산을 하고 들어왔는데 통일을 시키겠는가. 그 뒤의 미.소의 행위를 보면 충분히 알 수 있다.


바로 이들 소장파 무소속 의원들이 국회 내 최대세력을 형성하면서 반민족행위처벌법 제정, 외국군 철수 결의안 등을 주도했다. 결국 이승만의 최대 정적으로 등장한 소장파 의원들을 제거하기 위해 단행된 것이 국회 프락치 사건이었던 셈이다. 당시 이승만 광기 어린 정치 테러에 대한 중도파 의원들의 공포는 대단한 것이었다. 일례로 강원룡 목사 회고에 따르면 9.28수복 이전 안재홍은 서울에 은거하고 있었는데, 안재홍의 비서 조규회는 그 이유에 대해 "피난가고 싶어도 이승만이 전쟁이라는 기회를 이용해서 자신의 정적을 모조리 공산당으로 몰아 총살한다는 이야기가 있어 내려가지 못하고 있어요. 그래서 피난도 못 가고 숨어 계신답니다" 라고 말했다 한다.


국회 프락치 사건은 한국전쟁 이후 '법원 재난에 기인한 민형사사건 임시조치법'에 의해 사건에 대한 검찰의 공소가 멸실되었다. 법적으로 진실을 규명할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진 것이다. 그러나 이 미완의 정치재판 사건을 덮어둔 채로 그냥 방기해도 되는 것일까? 국회 프락치 사건은 "반공을 빙자한 정치적 반대자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 이었으며 신생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퇴행하는 분수령"이었고 이후 "반공 신화를 우리 사회에 고착시키는 텍스트가 되었다."


실제로 이승만 이후 전두환 정부때 까지 고문과 협박으로 확보한 거짓 자백을 바탕으로 정치적 반대자는 빨갱이로 만들어 제거하는 반공독재는 우리 정치의 유구한 전통이 된다. 부산 정치파동, 조봉암 법살, 인민혁명당 사건, 학원프락치 사건 등...셀수 없이 많다.(<<국회 프락치 사건의 재발견>>김정기.2008. <<소용돌이의 한국정치>>그레고리 헨더슨.2000.한울. <프레시안 북스> 박인규. 2021.6.4.도서참고)


참고도서


<<국회 프락치 사건의 재발견 1,2>> 김정기.2008.한울.

<<소용돌이의 한국정치>>그레고리 헨더슨.2000.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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