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르본대 철학교수는 왜 폭파 전문 레지스탕스가 되었나 > > 소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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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산 이야기

< 소르본대 철학교수는 왜 폭파 전문 레지스탕스가 되었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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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년의시간
댓글 0건 조회 27회 작성일 22-01-27 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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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자 게오르크 칸토어의 수학에서의 무한에 관한 연구, 그리고 이 연구가 야기한 고통은 오늘날 다시 생각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70여년 전인 1944년 2월 17일 열정을 다해 이에 대한 연구를 했던 한 남자가 아라스 요새에서 독일군에 총살 당했기 때문이다. 그때 막 40세가 된 장 카바이에스는 뛰어난 철학자–논리학자였으며, 무모한 레지스탕스 투사로 레지스탕스 조직의 수장이기도 했다.


그는 맨손으로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다. 파리 고등사범학교 수석 졸업한 카바이에스는 교각, 변압기, 기차, 공장을 폭파했다. 카바이에스는 잘 알고 있던 인식론자, 조르주 킹칼렘의  표현에 따르면 그는 '폭약을 휴대한 수리철학자' 였다.  여기서 '폭약'은 본래의 의미뿐만 아니라 비유적인 의미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의 사상이 급진적이었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철학의 의미는 경험했거나 심사숙고한 양심의 우월성을 개념의 우월성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에는 생의 철학과 개념의 철학 중 어느 것을 취할 것인가가 프랑스 철학계의 중심 화두였다. 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육체이면서 개념의 창조자인 주체가 이 두 가지 방향의 철학에 따라 모두 관여하기 때문에 카바이에스는 주체의 문제를 다루는 길을 열고자 했다. 그는 한편으로는 자신의 삶, 주관적인 삶, 유기적인 삶, 또 한편으로는 사고思考, 창조적인 능력, 추상적 능력에 대해 자문했다.


카바이에스는 철학에 있어서 자신의 색깔을 분명히 했다. 그는 철학은 과학과도 이성과도 유리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철학은 절대적으로 증거의 쇠락을 거부하고 엄정성의 산물이 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문학보다는 수학이 더 가깝다. 철학적 탐구한다는것은 입증하는 것이지 자신의 주관성을 믿고 따르는 것이 아니다. 지성의 정신상태를 솔직히 보여주기보다는 오히려 개념의 문제인 것이다. 진실에 대한 추구는 결국 약간의 망각을 전제로 한다.


1927년(24세)철학교수 자격을 취득했다. 그 이듬해 세네갈 부대에서 소위로 병역을 마친 후 여러 번에 걸쳐 독일에 머무르면서 나치 정권의 세력 확대를 관찰했고 분석했다. 부르바키가 새로운 수학적 사유방식을 고안하기 시작했을때 카바이에스는 대략적인 추산을 일삼는 수리철학을 뿌리 뽑고자하는 야망을 불태우고 있었다.


2차대전이 터져 1939년 9월 입대해 용맹을 떨치다가 1940년 6월 11일 벨기에에서 붙잡혀 포로가 되었지만, 프랑스 클레르몽 페랑으로 도망쳐 전쟁 중 그곳으로 자리를 옮긴 스트라스부스 대학교로 갔다. 그러자 대학교의 한 고위 관계자는 이렇게 외쳤다. "하지만 카바이에스, 이건 탈영이잖소!" 포로라는 사실은 체념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군인의 의무이거나 도덕적 명령인 것처럼. 카바이에스는 가르치는 동시에 루시 오브락, 비주리와 함께 리베라리옹 쉬드라는 레지스탕스 단체를 조직했다.


카바이에스는 카리스마로 조직원을 결집했다. 그는 또한 리베라시옹 신문 창간에도 기여했다. 그와 함께 활동했던 레지스탕스 동료들은 카바이에스는 한 정당이나 정치적 노선에 대한 충성심이 아닌 '논리에 의해'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했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카바이에스는 주체는 자신이 마주한 필연성에 대해 별로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받아들일 수 없는 것에 대한 투쟁은 불가피하며 따라서 필연적인 것일뿐, 그 이상은 아니다. 그리고 '투쟁'이란 복도에서 분노를 속삭이거나 복수심으로 가득한 편지로 우편함을 채우는 것이 아닌, 손에 무기를 들고 싸우는 것이다.


여러 번에 걸쳐 독일군에 잡혀 포로가 되었다가 도망쳤으나 마지막에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카바이에스는 가장 파괴적인 행동과 가장 추상적인 고찰, 어느 것 하나 포기하지 않았다. 그에게 이 두 가지는 대등하게 함께 가는 것이다. 성찰에서 행동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행동이 성찰을 앞선다. 사유는 개념의 표현이 아니라 개념의 과정. 연속이다.


1942년, 카바이에스는 외로운 감옥에서 <과학의 논리와 이론에 관하여> 라는 놀라운 저서를 집필했다. 종전 후 출간된 이 책은 철학계를 뒤흔들었다. 억압에 대한 증오로 더욱 대담해진 그는 온갖 위험을 감수했다. 1943년 게슈타포에 체포된 카바이에스는 고문 끝에 사형선고를 받고 5개월 후인 1944년 2월 처형됐다. 재판관들이 레지스탕스 활동 동기에 대해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의 아버지는 장교출신으로 아버지로부터 애국심을 배웠다 그리고 계속된 저항운동을 통해 패배의 고통이 줄어드는 것을 느꼈다. 또한 내가 칸트와 베토벤의 나라인 독일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리고 살아오면서 이 같은 독일의 대가들의 사상을 실천해 왔다는 것은 나의 이야기를 통해 입증할 것이다." 카바이에스의 철학적 기준들이 가장 직접적인 경로로, 그리고 최소한의 고통도 없이 그를 이끈 결론과 그의 출신, 교육, 투사의 기질이 그에게 부여한 결론은 동일하다.


그는 모욕과 억압을 당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이었다. 지하감옥에서 카바이에스의 사체를 발견한 이들에게 그는 단지 '무명 죄수 5호'일 뿐이다. 아마도 '무명(수학에서는 '미지수'를 뜻함. inconnu 라는 프랑스어로는 '무명, 신원미상'이라는 뜻. 수학에서는 여성명사 inconnue가 미지수를 뜻함)' 이라 불린 사실이 그에게 있어 영광스러운 칭호이자 가장 아름다운 묘비명이라는 점을 간수들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조르주 캉킬렘이 쓴 비문은 거의 모든 것을 말해준다. "일반적으로 철학자에게 있어 윤리학을 집대성한다는 것은 침대에서 편안히 죽을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다. 그러나 카바이에스는 전투에서 죽고자 할 때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함으로써 논리력을 집대성했다. 이렇게 그는 자신의 윤리학을 자연스럽게 일구어냈다. 이 같은 위대한 인물에게 있어 깊이 있는 철학자로서의 업적과 숭고한 투사로서의 업적을 분리하고자 하는 것은 말도 안된다.


바로 이 경우에 그가 이룬 업적은 그라는 인간 그 자체와 불가분의 관계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의 업적을 통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도 있다. 카바이에스는 혼란스러운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무한을 숭배하는 자의 이름으로 있는 힘을 다해 그가 부르짖은 실천적인 의무에 걸맞은 반열에 올랐다.(LEMONDE diplomatique 2014.5호 7쪽 에티엔 클라인 글 중에서 참고. <<지식인의 종말>>레지 드브레.2001.예문.)


참고도서


<< 지식인의종말>>레지 드브레.2001.예문.

<<한국 의병사 상.하> 이태룡.2014.푸른솔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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