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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서 배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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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또또
댓글 0건 조회 100회 작성일 22-11-18 0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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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반복된다고 한다.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희극으로. 그러나 역사에 무식한 사람이 더 많으면 영원히 비극만 반복된다. "3.1운동 주최자가 일본 순사보다 더 잔혹무도 했다" 는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이 많다. 일제강점기에도 '악질 친일파' 와 '밀정' 들은 일본순사보다 독립운동가들을 더 두려워했다. 3.1 정신만 계승되는 게 아니다. '악질 친일파' '밀정' 의 정신도 계승된다. 매해 3월 26일은 안중근 의사 순국일이다. 일본인들은 이토 히로부미가 죽은 날짜와 시각에 맞춰 26일 오전 10시경에 사형을 집행했다. 그래야 이토 히로부미의 혼령을 위로할 수 있다는 미신 때문이었다. 그런데 3월 26일은 이승만의 생일이기도 하다. 10월 26일이 안중근의 의거일이자 박정희의 사망일인 것과 마찬가지로 '공교로운' 우연이다. 


이 때문에 이승만 정권 때에는 정부 관계자가 안중근 의사 추모식에 참석한 적이 한 번도 없었으며, 민간에서 자발적으로 추모하는 사람들은 정권의 눈치를 봐야했다. 이승만과 그의 측근들은 이승만의 '생일날' 이 안중근의 '제삿날' 로 기억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안중근 의거 50주년인 1959년, 전창근이 감독과 주연을 맡아 당시로서는 블록버스터급 영화인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 을 만들었다. 안중근 순국일인 3월 26일에 개봉한다고 광고까지 했으나 예정일 직전에 개봉을 연기한다고 다시 광고를 냈다. 스태프 일동 명의의 광고문은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것일 뿐 절대로 다른 이유는 없다" 는 내용이었지만 '정권의 압력' 이 있었음을 폭로한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이 영화가 흥행에 성공을 거두자, 정치깡패 임화수가 이끌던 '반공예술인단' 이 더많은 예산을 투입해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 이라는 영화를 만들었다. 이 영화는 3.15 부정선거를 앞두고 전국 거의 모든 극장에서 '무료상영' 됐다. 안중근 동상도 1959년 3월 26일에 건립될 예정이었으나 이 역시 '외부의 압력' 으로 연기됐다. 안중근 동상을 세우자는 운동은 해방 직후에 시작됐지만 동상 건립은 차일피일 미루다가 남산에 이승만 동상이 선 뒤에야 실현됐다. 위치도 처음에는 장충단, 조금 뒤에는 서울역 광장으로 정했으나 정부는 이런저런 구실을 붙여 이승만 동상아래 잘 보이지도 않는 곳(지금의 숭의여대 자리)에 세우도록 했다.


같은 해 6월, 이승만 정부는 김구의 묘와 안중근의 가묘(假墓)가 있는 효창공원 옆에 운동장을 짓기 시작했다. 당시에도 "김구 선생 묘 옆에 사람들을 불러 모아 웃고 떠들게 만드는 것은 해도 너무 하는 일" 이라는 여론이 있었지만, 정부는 공사를 강행했다. 이승만과 김구, 안중근은 모두 황해도 사람이었다. 김구와 안중근은 10대 시절 한 집에서 산 적이 있었고, 안중근 의거 후 김구는 그를 '혁명가의 모범' 으로 칭송했다. 안중근의 동생과 조카들도 김구와 함께 일했고, 이봉창, 윤봉길이 속했던 '한인애국단' 본부는 안중근의 동생 안공근의 집이었다. 반면 이승만은 안중근 의거 직후에도 "세계 각국이 비폭력을 주장하는 세상에서 암살폭력을 용납할 수 없다" 며 그를 비난했다. 김구는 안중근의 정신을 계승하려 했고 이승만은 그의 정신을 배척했다.


안중근 의거로도 망국(亡國)을 막지는 못했다. 하지만 안중근은 허무하게 죽은 게 아니다. '물질주의자' 들은 "안중근이 이토를 죽여서 나라에 보탬이 됐느냐?" 고들 하지만 안중근이 쏜 총탄은 이토의 가슴뿐 아니라 나라야 어찌됐든 별 관심 없던 한국인의 '정신' 도 꿰뚫었다. 안중근의 의거가 있었기에 대다수 한국인이 일진회원 등의 토착왜구들과 안중근 사이에서 자기 위치를 측정할 수 있었다. 안중근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에게 '부채의식' 을 가졌기에 독립을 향한 꿈을 계속 간직할 수 있었다. 안중근과 이승만을 모두 존경한다는 사람이 많지만 이승만은 안중근의 정신을 배척했고, 안중근도 이승만의 정신을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 안중근의 순국일과 이승만의 생일 중 어느 것을 더 중시할지도, 안중근의 정신과 이승만의 정신 중 어느 것을 계승할지도 모두 스스로 '선택' 할 문제이다.


'친일파의 친은  본래 친구라는 뜻이 아니라 어버이라는 뜻' 이다. 일본어에서도 '오야지親父'는 아버지, '오야붕親分'은 아버지처럼 의지하는 사람' 이라는 뜻이다. 함석헌의 스승 류영모는 유교경전 '대학' 에 나오는 '재친민在親民' 을 '씨알 어뵘이 있으며' 로 풀었다. 여기에서 씨알은 민이고, '어뵘' 즉 '어버이로 섬기다' 는 '친' 이다. 안중근의 동지였던 정재관은 '친일파' 를 '일본을 의지하여 우리나라를 팔며, 일본을 의지하여 우리 황상폐하를 능욕하며 일본을 의지하여 우리 동포를 학살하며 잔인하고 악독하여 사람의 낯에 짐승의 마음을 가진 자' 로 정의했다. 다른 나라 친구가 원한다고 자기 나라를 파는 자는 없다. 자기 형제를 학살하는 자도 없다.


일본 극우주의자들의 주장을 앵무새처럼 따라하며 우리 국민들을 능욕하는 자들이 있다. 이 자들은 '일본과 친한 자' 가 아니라 군국주의 시대의 일본군을  '어버이' 로 섬기는 자들이다. 저들이 동족인 피해자들의 '명예'를 거듭거듭 짓밟는 건 자기들이 어버이로 섬기는 군국주의 시대 일본군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다. 이렇게 보면 저들이 이러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20세기 초 '친일파'와 같은 뜻으로 쓴 말이 '토왜土倭'이다. 대한매일신보는 토왜를 이렇게 정의했다. "낯짝은 한인이나 창자는 왜인인 도깨비 같은 자"


1980년, 광주시민을 학살하고 정권을 잡은 전두환 일당은 시대의 과제로 '정의사회 구현' 을 내세우고 '민주정의당' 을 만들었다. 그 일당의 '정의'는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과 진짜 정의로운 사람들을 잔인하게 학대하고 자기 편의 죄는 무조건 덮어주는 '파렴치한 가짜 정의' 였지만 그게 '진짜 정의'인 줄 아는 사람도 많았다. 일제가 망했어도 '친일파의 정신'이 나라를 지배했듯, 전두환 정권이 끝났고 당사자인 전두환이 죽었어도 '파렴치한 가짜 정의'는 여전히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다. 전두환의 '정의 구현'에 앞장섰던 사람들이 지금도 전두환의 정의를 추구하고 있다. '전두환 일당의 정의'가 살아있는 한 전두환의 시대는 끝나지 않았다. 


"김대중에게 돈 받았다고만 해라, 다음부터는 우리가 알아서 한다." 1980년 5월, 신군부는 민주화운동 관련자들을 고문하여 허위자백을 받아내고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을 조작해 법정에 세웠다. 당시 법원은 김대중 대통령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이제 전두환 정치의 시작이었다. 전두환이 한 짓을 그대로 따라하려는 사람에게는 전두환이 잘한 걸로 보일 수밖에 없다. 현재는 "고발만 해라, 다음부턴 우리가 알아서 한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다.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희극으로, 그러나 역사에 무식한 사람이 더 많으면 영원히 비극만 반복된다.


일제강점기 많은 독립운동가의 희생을 시비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은 것 같다.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독립운동가의 정신을 빼야 한다고 믿는 자가 아직 많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가 함께 반성할 일이다. '자유', '법과원칙', '공정', '상식'이 상실된 시대다.  그러기에 사람 목숨을 가지고 '정치 공세'로 억지를 부리는 모습은 친일파나 전두환의 정신을 이어받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천벌을 받을 일이다.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역사는 한 번 가르쳐 준 걸 잊어버리는 사람들에게 더 없이 가혹하다는 것을....(<<역사가 되는 오늘>>전우용. 본문 참조)


참고도서


<<역사가 되는 오늘>>전우용.2022.21세기북스.


<<죄의 문제>>카를 야스퍼스.2014.앨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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