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주의와 겁쟁이들의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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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진이 발생(2011년 3월 11일)하고 보름이 지나 어떤 교원들의 회식에서 한 직원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런 상황이니까 첫 건배는 그만두겠습니다." 건배를 생략하는 것과 지진 혹은 원전 재해는 도대체 어떤 관계가 있단 말인가. '이런 상황'을 '시국'으로 환언한다면, 이 말은 태평양전쟁 때 일본의 여러가지 행사에서 나왔던 바로 그 구호가 아닌가. 도대체 무엇이 '이런 상황'이란 말인가. 관계없는 일을 관계가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말투에서 분노의 감정을 느꼈다고 모임의 참석했던 한 교수는 말했다.
3월 11일부터 일본 여론은 경탄과 불안이 착종하면서 '큰일이다' 혹은 '힘내자' 라는 태도를 계속 표명할 수 밖에 없다는 압박감에 사로잡혀 있다. '사고 정지'(思考停止)(인지 대처 훈련 중 하나로, 부정적인 생각이 들 때 생각나지 않도록 하는 기법)상태에서는 '시국' 혹은 '지금은 중대한 시기니까' 라는 공허한 말을 머리에 새겨넣게 되고, 그로 인해 당연히 해야할 토론이나 문제 제기를 봉쇄해버리면서 할 필요가 없는 이야기만 전개된다. 지금 진행중인 사태는 원자력발전소의 사고, 그것을 둘러싼 도쿄전력이라는 거대 자본의 움직임, 국가의 대응, 지역사회문제, 더 나아가 3월 11일 이전 사회에 대한 성찰과 질문을 포함하면서 진행되는 중층적 사태다.
모든 신문이 지진으로 사망한 이들을 보도하던 와중에, 지난 4월 10일 도쿄도지사 선거에서 이시하라 신타로(2022.2.1 사망)가 당선됐다. 하필 이 시점에서 이시하라 말인가. 암담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시하라는 치안 대책의 필요성을 과거 일본이 식민지 지배를 했던 아시아 사람들을 향한 배외주의 맥락에서 번번이 표명하고 있다. "재해가 일어나면 00인이 소요를 일으킬 것이다." 이시하라는 일본의 패전 직후, 재일조선인과 재일중국인을 향해 던진 '삼국인' (三國人)이라는 말을 이 '00인'으로 표현했다. 이 발언은 1923년 관동 대지진 때 일반시민과 군, 경찰이 하나가 되어 조선인·중국인 ·사회주의자를 상대로 일으켰던 학살 사건을 사람들에게 상기시킴과 동시에, 그와 똑같은 폭력의 가능성을 끊임없이 예감하게 한다.
이시하라는 공동체에 적을 설정해 그곳에 증오라는 감정을 자극함으로써 구성되는 배외주의 내셔널리즘이다. 이런 '적'찾아내기의 배후에는 개개인이 품고 있는 불안이 있다. 이들 마음속에 내재된 불안을 공통의 적에게 증오로 묶어내는 것이다. 불안이 만연한 상황에서 <재해방지공동체>야 말로 이번 선거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이시하라에게 보내준 것이다. 이는 복구 작업과 중첩되면서 공허한 '힘내자 일본!' 이 구호가 되어 전국에 등장하고 있다. 자위대의 활약은 영웅담으로 이야기되고, 한반도에 관한 군사 행동을 상정한 미-일 방위협력 지침에 근거한 근거한 재해방지 지원은 선의로 인해 아무런 사회적 논의도 없이 받아들였다. 시국의 공기(분위기)를 간파한 것처럼 보인다.
시국을 말하면서 혹은 편승하여 말도 안되는 자들이 지금 여기저기에서 얼굴을 내밀고 있다. 묘한 말의 감각이 엄습하고 있다. 의견을 내야 할 시기지만, 지금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원전을 둘러싼 시비 등 지금 말을 해야 할 때이지만 말을 할 때 사려깊은 언어가 필요하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사회가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다는 것이다.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의 붕괴를 둘러싼 도쿄전력, 국가, 언론, 연구자 등의 보신주의와 기만에 가득찬 발언에 자책이 뒤섞인 분노를 느끼는 것이다. 일본이라는 나라가 썩어빠져도 한참 썩어빠졌다는 것을 내부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교수는 일본이라는 국가에 절망을 느낀다.
지금 이야기해야 할 것은 성급한 복구작업도, 이후 재해방지대책도 아니다. 복구작업이든 '힘내자 일본!'이든 거기에는 무엇인가를 없던 것으로 하고 앞을 향해 전진하고 싶다는 욕망이 존재한다. 3월 11일 이후를 '전후(戰後)'라고 표현하는 사람들이 있다. 전후 일본사회에서 '전쟁체험을 어떤식으로 이야기할 것인가' 라는 논점이 큰 사상적 과제로서 존재했다. 거기에는 마루야마 마사오를 필두로,'광의의 전쟁 체험의 사상화'라고 일컬을 만한 지적 작업의 연구자들이 있었다. 동시에 전후 일본 지식인의 등장은 '새로운 일본!'과 '힘내자 일본!'이라는 미래지향적 구호아래 제국이 아시아 전역에 각인한 고통을 기억하기도 전에 없었던 것으로 하면서, '복구'라는 전후를 내딛으려는 부인의 구도와 연관돼 있다.
결과적으로, 폐허를 앞에두고 요란스레 이야기되던 전후는, 전쟁 체험을 아전인수 격으로 취사선택해 땅속 깊이 매장해버렸다. 일찍이 전쟁 체험을 둘러싼 국가와 지식인의 책임을 논의한 쓰루미 슌스케는 "1945년 8월15일, 일본 사회는 패전을 종전으로 둔갑시켰다. 그때부터 패전론은 전쟁 체험 위에 재빠르게 천을 덮어씌우며 사회 저변으로 확대해버렸다"고 기술했다. 위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시작되지도 않았다. 위기는 진행 중이며 이런 진행형을 '힘내자 일본!' 에대한 비판으로 발견해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현재 진행 중인 이런 사태 앞에서 새삼 다시 생각하게 되는것은 원전이라는 거대한 억압장치다. 이 장치는 억압 자체를 비가시화한다. 방사성 물질을 두려워 하지 않고 활동하는 경찰이나 소방대원, 자위대, 혹은 도쿄전력 직원이 '결사대'라는 말로 영웅시되고 있다. 그러나 원전은 가동될 때부터 일관되게 피폭노동자를 계속 양산해왔다.피폭은 사고가 아니다. 이 노동은 불가피하게 신체를 회복 불가능한 형태의 죽음으로 몰아간다. 노동력을 파는 임금노동이라기보다 목숨을 계속 단축시키는 것을 암묵적 전제로 요구한다. 피폭 노동의 존재가 미래사회를 짊어지는 것으로 여겨지는 원전 존립의 전제 조건이다.
인간에게 이런 노동은 허용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 노동의 영역은 겹겹의 하청업체를 중심으로 시행되고, 또 그 존재 자체가 비가시화된다. 원전 노동의 현장감독으로 종사하며 본인도 피폭됐던 히라이 노리오는 "작업원 모두가 매일 피폭 당한다. 그것을 본인이나 외부에 알려지지 않도록 처리하는 것이 바로 관리책임자의 일이다"라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피폭당하고 죽어간다. 반복하지만, 이것은 생각지 못한 재해도, 예상치 못한 사고도 아니다.
원전 자체의 일상상태가 기민(棄民)이라고 말해야 하는 이 노동의 영역을 전제로 한다. 사회는 기민 영역을 없었던 것으로 묵살해왔다. 그것은 기업이나 국가의 문제만이 아니라, 그 깊은 곳에 숨겨진 비밀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도록 감시하고 동시에 외면해온 사람들 모두의 문제다. 그리고 피폭을 두려워하지 않고 결사의 각오로 돌입하는 군인적인 영웅담은 그 자체가 이 사회 전체에 은폐된 억압구조를 추인하고 보강한다.
그러나 계속되는 피폭확대, 비가시화돼온 이 영역은, 복구의 이름으로 묵살되는 모든 반동적 움직임에 온 힘을 다해 저항하고 있다. 사회전반에 만연한 위기감은 이런 기민 영역에 대한 최초의 반응임이 틀림없다. 원전 사고 이후 어느 자위대원은 주둔지에서 도주했다. 그 역시 두려웠던 것이다. 자위대는 곧장 그를 징계했고 사회분위기는 "적진 앞에서의 도망" "군법회의에 회부하라" 따위의 비난 여론이 등등했다. 또한 원전과 관련해서 지금 일본 사회에 침투하기 시작한 것은 목숨을 아낌없이 내던져 용감하게 행동하는 것을 영웅으로, 도주하는 것을 적진 앞에서 도망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심성이다. 원전은 일종의 전장(戰場)이다. 일본인들의 뇌구조가 아마도 19세기 말에 머물러 있다. 원전 사고가 숨겨서 될 일인가? 그리고 그 앞에서 도망가면 외국인 내지는 적진앞에서 도망병으로 취급하며 돌격만을 외치고 있고, 그 희생은 동조하고 있는 국민들 몫이다. 역시 일본인들은 내가 즐겨쓰는 말이있다. 일본의 미래는 "삶은 개구리"이다.
문제는, 이들의 희생을 미화하는 사회전체의 심성이다. 공허한 '힘내자 일본!'은, 과거 태평양전쟁 때의 '나라를 위하여'를 계승하고 있다.이 결합은 어떻게든 살아 남으려는 의지를 '적진 앞에서 도망'으로 지탄하는 언설 주변에 반드시 존재하게 될 것이다. 전장에 등장하는 사형선고를 포함한 군사적 논리가 일상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계속 확산되는 방사성물질을 앞에 두고 그 곳에 머무르는 일이 피폭을 의미하는 이상, 도망쳐서는 안된다는 논리는 군사논리로서 수많은 사람들을 동원하고 있다. 본인들도 원전사고를 매우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으며, 그러나 국민과 대외에는 안전하다는 말만 되새김질하고 있다. 거기에서 나오는 오염수도 방류할때는 그 주변국(한국 등)은 물론이고 해양의 오염에 결정적으로 인류에 씻지 못할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만연하는 불안, 회복할 수 없는 슬픔을 안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은 이미 무너지고 있다. 역시 무서운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미래가 빼앗기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이 피난하는 사람들에게 도망치지 말라며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그 비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도 함께 탈출하고 싶을게다. 이 탈출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탈출할 사람들과 남는 사람들이 '겁쟁이'로 만나는 것이다. 탈출하는 사람은 외국인으로 간주한다. 이런 배외주의 내셜널리즘이 굳게 세워져 있다. 이런 논리는 '삼국인'을 이야기하는 이시하라의 논리이기도 하다. 이런 철지난 논리에 저항하고 또 저항에서 몰아내야할 것이다.
지금 해야할 일은 군사논리에 얽힌 자신의 일상을 주의 깊게 비판하는 일이다. 삶에 대한 불안이나 공포를 타자에게 떠넘기는 것이 아니라 겁쟁이로서 받아들이면서, 타자와의 관계로서 재구성하고 다른 일상공간을 창출해내는 일이다. 죽음의 각오를 맹세하는 것이 아니라 겁쟁이이기 때문에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하고 그렇기 때문에 사람 죽이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사회를 구성해가는, 그런 가능성에 미래를 거는 작업이다. 그리고 정부에 대해 올바른 소리를 이젠 해야한다. 당장의 오염수 방류 문제도 하지 않도록 내부에서 저지하는 게 인류사회의 구성원으로 당연히 해야할 몫으로 본다. 이를 방기하고 지나간다면 정말 씻을수 없는 죄를짓게 되는 것이니 목숨은 쓸데 없는 곳에 걸지말고 정의에 거는 게 맞다.
겁쟁이들의 미래는 주변의 일을 타인의 일로 생각하고 못 본척 눈감고 입닫고 하면 앞날이 순탄치 않을 것이다. 옆의 겁쟁이들과 타인의 일이 아닌 말을 획득하면서 다른 미래의 시작이 될 것이다. 한국의 대통령이 제대로 사고 치고 있다. 이번 방문기간에 오염수방류 문제는 자기가 국민들을 설득하겠다고 약속했다는 일본 언론의 뉴스가 나왔다. 설득당하고 이해할 시민이 있을까? 까도까도 나온다. 어디까지 약속을 하고 왔는지 앞날이 큰일이다. 나라가 망하고 있다.
읽을만한 책
<<동학과 동학농민혁명>>박맹수.2011.모시는사람들.
<<러시아 혁명>>E.H카.2017.이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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