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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사회가 부재한 현상이 빚은 파시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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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또또
댓글 0건 조회 85회 작성일 23-11-18 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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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유럽을 낳은 17세기 초반의 삼십년전쟁에서 독일 지역은 전쟁터를 제공했으면서도 전쟁의 대가는 얻지 못했다. 다른 나라들은 전쟁을 도약의 계기로 삼은 반면 독일은 전쟁의 극심한 피해만 고스란히 떠안았을뿐 전쟁 이전과 전혀 달라진게 없었다. 프로이센이 신흥 강국으로 떠올랐지만 아직은 독일 지역을 대표하는 국가는 되지 못하고 19세기 후반에 가서야 통일 독일이 형성된다. 프로이센은 17세기 이래로 북독일의 리더로 성장하면서 왕 빌헬름 1세는 독일 통일의 이념에 투철한 비스마르크를 재상으로 임명했다. 당시 독일의 정치적 환경은 무척이나 열악했다. 영국과 프랑스처럼 절대주의의 과도기를 거치지 않고 근대 시민사회의 질서에 뛰어든 탓으로 자유주의 세력은 역사적 경험에서나 실력에서 새 사회를 주도할만한 역량을 지니지 못했다. 그래서 독일의 통일과 발전은 왕과 귀족들이 주도할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은 시민사회의 견제를 받지 않은 국가가 어떤 길로 나아가는지를 잘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가 된다.


비스마르크는 외교와 전쟁을 수단으로 재미를 본다. 사건을 조작하여 전통적으로 프랑스에게 적의를 가진 프로이센의 국민들의 분노를 유발시키고, 자기편을 단결시키며, 적을 자극하는 삼류 수법이지만 과도한 민족주의 시대에는 그 수법이 통했다. 실제 이 수법은 20세기 나치 독일의 선전장관 괴벨스의 손에서 화려하게 부활했으며, 민족주의가 불균형적으로 팽배한 현대 사회의 일부 국가에도 여전히 통한다. 과연 프로이센 국민들은 흥분했고, 군관민 일체로 무장했다. 전 국민의 지지에 힘입어 총력전을 펼칠수 있었다. 이런 조건으로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연승을 했다.그 결과로 빌헬름 1세는 적지의 한복판, 그것도 루이14세가 세운 베르사유 궁전에서 당당하게 대관식을 치렀다. 그의 명칭에는 카이저라는 직함이 찍혔는데, 그것은 바로 옛 로마의 황제를 뜻하는 카이사르의 독일식 명칭이다. 드디어 독일 제국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독일 최초의 국민국가가 '제국'을 표방했다는 것은 이후 독일의 행보, 나아가 유럽 세계의 진로에 짙은 암운을 드리우는 사건이었다.


60여 년 뒤 아돌프 히틀러는 신성로마제국을 제1제국, 빌헬름과 비스마르크의 합작품인 독일제국을 제2제국이라 부르고, 자신의 나치제국은 제3제국이라고 부르게 된다. 이는 주변국들에게 심각한 위협을 안겨주었고 역사적 비극을 일으켰다. 잔머리의 대가인 비스마르크가 재상으로 앉아 있을 때는 그의 치밀한 외교술 덕분에 그런대로 유럽의 평화가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나 1888년 스물아홉의 나이로 할아버지 빌헬름 1세를 계승한 젊은 황제 빌헬름 2세는 그런 어쩡쩡한 평화에 만족하지 못한다. 모름지기 평화란 기득권자의 모토다. 태평성대가 지속된다면 기존의 질서가 바뀌지 않는다는 뜻이므로 역전이란 없다. 없는 놈 팔자에는 난리라도 나야 한다.그래야 인생 역전이 가능하니까. 젊은 황제의 야심이 드러나면서 독일이 서서히 패권주의의 길로 나서자 유럽 대륙에는 전운이 감돌기 시작한다. 비스마르크도 평화주의자라고 부를 수는 없지만 서유럽 국가들의 힘에 대항할 자신이 없기에 외교를 통해 국제질서의 현상 유지를 꾀한 것뿐이다. 서유럽 국가들의 특징은 자유주의를 용인할뿐더러 시민 세력이 장악한 의회를 국가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독일은 서유럽과 반대 체제를 가진 나라들과 협력을 한다.


자유주의와 의회, 시민의 정치 세력화를 용인하지 않는 체제라면 무엇일까? 바로 제국 체제이다. 당시 유럽에서 제국 체제를 취하고 있는 나라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과  러시아, 그리고 신생 제국인 독일이다. 이들은 '삼제동맹'을 맺는다. 이는 오래가지 못했지만, 유럽에 남아있는 세 제국이 동맹을 이룬다는 발상은 유럽에서 수구적인 제국 체제가 전체적으로 위기에 처했음을, 아울러 제국들이 그 위기를 인식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는 사례다. 1882년 삼제동맹은 러시아 대신 이탈리아를 가입시켜 삼국동맹으로 발전하는데, 이탈리아는 제국이 아니지만 독일과 같은 처지이고 이해관계도 같다. 이것으로 유럽의 세력 판도는 더욱 분명해졌다. 선발 제국주의 대 후발 제국주의의 대립이 가시화돤 것이다. 두 그룹 모두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를 취하고 있지만, 전자는 시민사회를 브레이크로 장착한 의회민주주의 체제이고 후자는 시민사회가 부재한 국가주의 체제다. 이젠 싸우는 것 밖에 남지 않았다. 패싸움이 벌어질 양상이다. 빌헬름은 비스마르크도 해임하고 유럽의 동쪽 끝에서 또 하나의 제국을 동맹자로 맞아들인다. 아시아계 터키제국(오스만제국)이다. 이로써 베를린-비잔티움-바그다드를 연결하는 3B라인이 실현되었다.


이제 '이교도' 와도 선뜻 동맹을 맺을 만큼 유럽에서 종교 문제는 무의미해졌다. 적의 적은 나의 친구, 이 조잡하고 유치한 논리가 원칙과 이념이 실종된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복잡한 유럽 세계를 관철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와 터키는 수십 년 전만 해도 앙숙이었으나 이해관계가 얽히면서 두 제국은 친밀감을 느낀다. 터키는 명분상으로는 발칸의 관리자였으나 실제로는 관리할 힘을 잃은지 오래다. 오스트리아는 제국이면서도 식민지 개척에 나서지 못한 이유가 항구가 없기 때문에 발칸 지역은 욕심 나는 지역이었다. 터키의 묵인 아래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를 집적거린다. 당연히 세르비아는 분노한다. 터키가 없는 자리에 오스트리아가 들어오려하니 세르비아와 갈등이 생기고 온갖 불화가 쌓였다. 이런 상황을 가리켜 후대에 발칸은 유럽의 화약고라 불리게 되었다.이제 방아쇠만 당기면 폭발할 판이다. 결국 1914년 6월28일 오스트리아 황태자 페르디난트 부부가 사라예보를 방문했다가 암살된 사건이 제1차 세계대전의 방아쇠가 된다.


이번 전쟁이 그때까지의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가 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 못했다. 전쟁은 장기전으로 바뀌면서 전선 자체가 무수한 참호의 라인으로 바뀌었고 인류 역사상 가장 비참한 전쟁이 지루하게 지속되었다.명확한 전선을 이루면서 장기전으로 대치하다보니 총력전일 수 밖에 없었다. 그전까지는 아무리 규모가 큰 전쟁이라해도 군사력으로만 승부했지 전 국민이 동원되는 총력전을 펼치지는 않았다. 이는 각국의 지배층만이 아니라 국민들까지도 국민국가의 개념을 확실히 체득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실제로 참전국들의 정부는 자국민들에게 애국심과 자발적 동원을 적극적으로 선전하고 호소했다. 독일의 항복으로 전쟁은 일단락되었다. 1차대전은 그전까지의 전쟁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참전국들의 수와 동원된 병력, 투입된 무기의 양도 유례가 없었지만, 무엇보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유럽만이 아니라 아시아와 아메리카까지 연관된 '세계대전'이었다.


시민사회라는 제동장치가 없는 자동차는 질주할 수밖에 없다. 1차대전의 원인이었던 제국주의적 경쟁은 그런 질주가 현실로 드러난 하나의 양상에 불과했다. 질주 본능 자체가 제거되지 않는 한 질주는 어떤 양상으로든 재연될 것이며, 점차 폭주로 변할 게 분명했다. 실제로 이번에는 예고편부터 예전에 없었던 파괴력을 선보였다. 민주주의 세력과 국제 파시즘의 마지막 결전, 그 예고편은 1936년의 스페인 내전이었다. 여기에서 파시즘과 독재의 차이가 있다. 흔히 두 체제를 같은 것으로 여기지만, 독재는 정부가 일방적으로 주도하는 체제인 데 반해 파시즘은 국민들이 정부를 지지하고 정부가 표방하는 이념에 자발적으로 일체화된 체제를 가리킨다. 국민의 자발성을 유도하려면 무엇보다 국민의 애국심이 필요한데, 애국심을 진작시키는 데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바로 파시즘이다. 파시즘은 극단적 민족주의의 한 형태다. 히틀러나 무솔리니가 없었다 해도 독일과 이탈리아는 파시즘 국가가 되었을까? 그렇다고 본다. 이유는 20세기 초 독일과 이탈리아는 지배층만이 아니라 일반 국민들조차 대부분 자신과 조국의 처지에 불만과 분노를 품고 있었으며, 언제든 기꺼이 파시즘으로 무장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심지어 지식인들조차 크게 다를바 없었다. 당시 독일과 이탈리아는 시민사회가 없고 국가만이 존재하는 불균형한 체제였으며, 따라서 사회전체가 파시즘으로 쏠릴수 있는 상태였다. 그 점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가 독일의 반유대주의다.


1933년 총리로 취임한 히틀러는 자신의 집권이 독일 국민의 불만에 힘입은 것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 불만을 궁극적으로 해소하려면 전쟁을 거쳐야 하지만 단기적으로는 속죄양이 필요했다. 그 타킷이 바로 유대인이었다. 게르만 민족의 조상인 아리아인은 고대에 중동을 지배하던 유대인의 셈족을 물리치고 우수한 인류 문명을 건설했다. 게르만 민족이 역경에 처한 현재, 다시 과거의 위대한 역사를 재현해야 한다. 아리아인의 고대 신비주의 사상, 프로이센을 절대정신의 구현이라고 믿은 헤겔의 철학, 계몽주의와 자유주의의 허구성을 논박하고 강자의 도덕을 설파한 니체의 사상, 게르만 신화를 통해 독일 민족의 위대함을 강조한 바그너의 악극이 기묘하게 뒤틀린 채 결합된 히틀러의 나치 이데롤로기는 반유대주의의 모토를 당시 국민들에게 심정적으로 호소했다. 2차대전은 파시즘이라는 비정상적인 수단을 동원해 국제 역학의 변화를 꾀한 것이었다. 1차대전은 전쟁의 조건이 성숙한 상태에서 극히 우연적인 계기로 발발했다. 그러나 파시즘을 '의식적으로' 수용한 2차 대전의 도발국들은 치밀하고 체계적인 준비를 갖춘 다음 계획적으로 전쟁을 일으켰다. 따라서 사라예보 사건 같은 방아쇠가 필요없었다. 


2차대전의 내용은 이미 잘 알고 있으리라고 본다. 말하려는 내용은 파시즘이다. 파시즘의 힘은 놀라웠다. 파시즘은 파탄지경에 이르렀던 국가를 불과 20년 만에 더 큰 전쟁의 주역으로 일으켜세웠다. 하지만 그것은 광기의  힘이었다. 파시즘의 광기에 사로잡힌 국가는 생산과 건설의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고 전란과 파멸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 엄청난 광기의 에너지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집권한 파시즘 정권이 선전선동을 통해 국민들에게 파시즘을 심어주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잘못짚은 맥락이다. 파시즘은 역사적 배경도 없고 필연성도 없다. 다만 히틀러나 무솔리니 같은 소수의 미치광이들이 대중을 조작해 권력을 획득하고 역사를 잠시 농락했을 따름이다. 2차대전은 단지 광기 어린 전쟁일 뿐 어떤 법칙도 없다. 그저 역사적 우연이 빚어낸 대참화라고 볼수 있겠다. 파시즘은 시민사회의 경험이 결여된 국가들에게 필연적으로 생겨난 체제다. 앞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시민사회의 경험이 없었던 국가들은 1차대전에서 실패를 겪었으나 그때는 제국주의의 모순만이 해소 되었을 뿐 시민사회가 부재했다는 역사의 행정 자체가 바로 잡히지는 않았다. 게다가 당시 독일과 이탈리아는 국민들 자체가 파시즘을 원하고 있었으므로 파시즘은 정권의 선동이나 강요에 의해서 퍼진게 아니다. 어찌 수많은 대중을 상대로 한 이데올로기 조작이라는 게 대체 가능이나 하느냐 말이다. 


파시즘은 19세기 서유럽 세계가 제국주의화되면서 싹트기 시작한 것이었지만, 길게보면 중세의 질서가 해체되는 근대 초기(17세기)부터 그 씨앗을 찾을 수 있다. 그랬기에 파시즘의 문제가 해결된 2차대전 직후 유럽 세계는 다시 평화를 찾을 수가 있었다. 물론 유럽 이외의 세계에서는 그뒤에도 군부독재와 같은 '유사' 파시즘에 시달리고 있기는 하다. 파시즘은 시민사회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이다. 파시즘이 시민사회의 '부재'가 빚어낸 산물이었다. 현재의 한국사회를 보면 시민사회가 부재한 상태이고 그 활동성이 예전보다 현저히 떨어져 있다. 국민들의 사고나 의식이 진정 자유를 누릴수 있는 역량이 없는 상태에서 도덕과 윤리의식마저 땅바닥을 치는 정도로까지 떨어졌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인물이 대통령에 당선되어 '짝퉁' 독재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시민사회의 역량이 부족하다보니 국내의 민생은 내 팽개치고 국외에 나가 돌아다니고 있으니 이걸 뭐라 해석해야될까? 외교부장관은 어디갔나? 그것을 보고만 있는 시민들은 뭐란 말인가?


참고도서


<<파시즘의 대중심리>>빌헬름 라이히.2014.그린비.


<<역사>>남경태.2009.들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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